술에 취해 회상한 나의 과거에서 문득 첫째의 미래가 떠올랐다

1992년에 방에 컴퓨터가 놓였다.

삼보 286AT였다. 컬러 그래픽카드가 붙어 있었고 화면은 640x480이 나왔다. 하드는 40메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모뎀도 달려 있었다.

그해 전교 8등을 했다. 전국모의고사에서는 103등이 나왔다. 지금 다시 봐도 그 정도면 잘한 성적이다. 어머니가 그걸 보고 사줬다.

원래 내 물건이 아니었다. 컴퓨터 가게 사장이 어느 회사에 납품하려고 잡아둔 모델이었는데 그게 나한테 왔다. 1992년이면 386DX가 한창이던 때다. 286은 그 시점에 이미 남은 물건이었다.

대신 화면이 좀 이상한 조합이었다. 640x480은 VGA 규격이다. CGA는 320x200이고 EGA는 640x350이니까, 본체는 재고인데 그래픽카드만 비싼 게 붙어 있었던 셈이다. 납품용으로 잡아둔 물건이라 그랬을 것이다. VGA가 얼마나 비쌌는지는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사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첫 선생은 컴퓨터 가게 사장이었다

컴퓨터를 켤 줄을 몰랐다.

그래서 판 사람이 가르쳐주기로 했다. 매일 한 시간씩 일주일을 가게에 갔다. 배운 건 도스 명령어와 디스켓 다루는 법이었다. dir을 치면 목록이 나오고 cd로 디렉터리를 옮기고, 디스켓을 넣고 a: 를 치면 그쪽으로 넘어간다는 것. 그 정도가 일주일이었다.

그다음이 게임이었다. 사장이 게임을 복사해줬다.

지금 와서 보면 그 사람은 게임을 복제해서 팔기도 했다. 좋게 포장할 생각은 없다. 그때 게임이 그렇게 돌았고 나는 그 경로의 한복판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가게를 봐주게 됐다. 사장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앉아서 손님을 받았다. 애들이 게임을 복사하러 오면 내가 복사해줬다. 그러면서 나도 몇 개씩 챙겨왔다.

용돈이 생기면 용산에 갔다. 5.25인치 디스켓을 샀다. 한 장에 1.2메가짜리를 박스로 사다가 다 채웠다. 게임 하나가 디스켓 여러 장에 나눠 들어가던 시절이라 금방 없어졌다.

학교에서 인기가 좋아졌다. 게임을 가진 애가 나밖에 없었으니까.

성적은 이때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국 103등이 그 시작점이었다.

정보는 항상 옆에서 왔다

중2 겨울에 학교 친구가 PC통신을 알려줬다. 하이텔이 있고 신천지가 있다고 했다.

하이텔을 조금 해보다가 신천지로 넘어갔다. 신천지가 무료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01410이나 01411로 전화를 걸어서 들어간 다음 jsd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회선료만 나가고 이용료는 따로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01410은 한국통신 하이텔 접속번호이고 14.4kbps용이다. 01411은 그 고속회선이라 28.8이나 33.6이 붙는다. 그러니까 신천지는 자기 망을 깐 게 아니라 한국통신 부가통신망 위에 얹혀 있었던 거다. 그래서 회선료만 내면 됐다.

전자신문 1997년 12월 24일자에 신천지PC통신 기사가 있다. 대전 지역의 무료 PC통신 업체라고 나온다. 그때 이미 무료 이용자가 20만 명이었고 다음 해에 50만 명을 목표로 잡고 있었다. 웹 검색과 텔넷을 무료로 열었고 바둑기보와 머드게임, 온라인북, 청소년 고민상담 같은 걸 붙였다는 내용이다. 접속은 01410의 정보세계에서 ID를 발급받는 방식이라고 적혀 있다. 내가 하던 그 방식 그대로다.

내가 알기로는 증산도에서 운영했다. jsd라는 접속 문자열이 그 이니셜과 맞는다. 무료로 푼 이유가 뭐였는지는 짐작만 한다.

어쨌든 무료였던 게 컸다. 중학생이 부모 눈치 보면서 쓸 수 있는 통신이 그것밖에 없었다. 유료 서비스는 쓴 만큼 요금이 붙었고 그 고지서가 집으로 갔다.

거기서 부산 사는 친구들을 만났다. 시작은 게임 얘기였다.

통신 프로그램은 이야기를 썼다. 경북대 컴퓨터 동아리 하늘소가 만든 거다. 1988년부터 만들어서 1989년 12월에 프리웨어로 풀었고, 나중에 그 사람들이 큰사람컴퓨터를 차렸다.

재밌는 건 이야기가 통신 프로그램이긴 한데 모뎀 통신은 거의 부가기능이었다는 점이다. 한글이 본체였다. 도스에 한글이 없던 시절이라 한글을 화면에 띄우는 것 자체가 기능이었다. 한글을 보여주려고 만든 프로그램에 통신이 붙어 있었고, 그게 통신 프로그램의 표준이 됐다.

나는 하늘소를 전북대 동아리로 알고 있었다. 34년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이 글을 쓰면서 경북대인 걸 알았다. 국내 프로그램은 저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건 안 틀렸다. 이야기는 실제로 표준이었다. 대학만 틀렸다.

애플 컴퓨터용 책으로 GW-BASIC을 배웠다

중3 때 친구가 GW-BASIC을 알려줬다. 프로그램이라는 걸 내가 만들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책이었다.

내가 보던 책은 애플 컴퓨터용 베이직 책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 보는 책으로 기억한다. 어디서 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베이직 책이니까 베이직 책인 줄 알았다.

에러가 났다. 책에 있는 대로 쳤는데 에러가 났다.

원인을 몰랐다. 오타를 의심하고 처음부터 다시 쳤다. 또 났다. 한 줄씩 지워가면서 어느 줄에서 나는지를 찾았다. 찾긴 찾았다. 그런데 왜 그 줄이 문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책에는 그 줄이 멀쩡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지금 확인해보면 이유가 명확하다.

Applesoft BASIC은 화면을 지울 때 HOME을 쓰고 GW-BASIC은 CLS를 쓴다. 커서를 옮길 때 애플 쪽은 HTAB과 VTAB인데 GW-BASIC은 LOCATE 하나로 두 개를 다 한다. HTAB 10은 LOCATE ,10이 되고 VTAB 5는 LOCATE 5,가 된다. 그래픽은 더 벌어진다. 애플은 HGR로 고해상도 모드를 켜고 HPLOT으로 점을 찍는데, GW-BASIC은 SCREEN으로 모드를 잡고 PSET으로 점을 찍고 LINE으로 선을 긋는다. HPLOT 10,20 TO 30,40이 LINE (10,20)-(30,40)이 된다.

이름이 겹치는 게 거의 없다. 그러니까 에러가 나는 게 당연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대응이 되는 것들이다. 이름만 바꾸면 같은 일을 한다.

문제는 대응 자체가 없는 것들이다.

애플 베이직 코드를 GW-BASIC으로 옮긴 기록을 보면 CALL 62450 같은 게 나온다. 고해상도 화면을 초기화하는 명령인데, GW-BASIC에는 대응하는 게 없다. 줄 끝까지 지우는 CALL -868도 마찬가지다. 이건 명령어 이름이 다른 게 아니다. 애플 II라는 기계의 특정 메모리 주소를 직접 부르는 거라서, 그 기계가 없으면 그 숫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

키보드를 읽는 것도 그렇다. 애플은 PEEK(-16384)로 읽는다. 음수 주소다. GW-BASIC에서는 INKEY$를 쓴다. 62450이 왜 62450인지, -16384가 왜 -16384인지는 책에 안 적혀 있었다. 그냥 그렇게 쓰라고 되어 있었다.

변수 이름도 함정이 있다. Applesoft는 변수명의 앞 두 글자만 구분한다. COUNT와 COLOR가 같은 변수가 된다. 그래서 애플 쪽 코드는 변수명이 짧다. 짧게 쓰는 게 습관이 아니라 규칙이었다.

그러니까 책이 틀린 게 아니었다.

그 책은 맞는 책이었다. 문법도 정확했고 설명도 맞았다. 애플 II를 가진 애가 봤으면 그대로 됐을 거다. 초등학교 1, 2학년용이었으니 아마 그 수준에서 제일 잘 설명한 책이었을 수도 있다.

틀린 건 그 책이 내 기계의 책이라는 전제였다. 그리고 그 전제는 책 안에 안 적혀 있었다.

책은 자기가 어느 기종의 책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물어보면 답은 한다. HOME을 어떻게 쓰는지 찾으면 정확하게 알려준다. 62450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려준다. 다만 그 숫자가 네 컴퓨터에서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말은 안 한다.

그 말을 해줄 수 있는 건 그 책을 밖에서 보고 있는 사람뿐이다.

나한테는 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 걸렸다.

호롱불로 서버를 돌렸다

같은 해에 사설 BBS를 열었다. 호롱불이라는 프로그램을 썼다.

1991년에 최오길이라는 사람이 만든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이다. 그 전에 1990년 10월에 조병철이 만든 카페가 최초였고, 하성욱의 곰주인과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뒤를 이었다. 호롱불이 그중에서 제일 많이 쓰였다.

호스트를 돌린다는 건 전화선 하나를 그 컴퓨터에 계속 물려둔다는 뜻이다. 모뎀을 켜놓고 설정을 잡아두면 누가 전화를 걸어서 들어온다. 들어와서 글을 읽고 쓰고 파일을 받아 간다. 그 시간 동안 그 전화선으로는 통화가 안 된다.

집 전화가 하나뿐인 집에서 이걸 하려면 협상이 필요했다. 그때 사설 BBS를 운영한다고 하면 통신에서는 그것만으로 실력 인증이었는데, 실력보다 먼저 필요한 게 전화선이었다.

여기서 방향이 한 번 뒤집혔다.

그전까지 나는 받기만 했다. 사장한테 받고 친구한테 받고 통신에서 받았다. 호롱불을 올린 다음부터는 누가 나한테 걸어서 들어왔다. 중학교 3학년이 전화선 하나로 정보가 나가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서버를 하나 띄운 건데, 그때는 그게 방에서 됐다.

같은 해에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땄다.

벽이 두 번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패치 파일에 관심이 갔다. 실행 파일의 특정 위치를 고쳐서 동작을 바꾸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실행 파일 자체가 궁금해졌다. com은 뭐고 exe는 뭔지, 둘이 왜 나뉘어 있는지를 찾아봤다.

com은 헤더가 없다. 파일 내용이 메모리에 그대로 올라가고 100h 번지에서 시작한다. 대신 코드와 데이터와 스택이 한 세그먼트 안에 다 들어가야 해서 64K를 못 넘는다. exe는 앞에 헤더가 붙고 그 안에 재배치 정보가 들어 있다. 그래서 여러 세그먼트를 쓸 수 있고 크기 제한이 사실상 없다. 대신 로더가 헤더를 읽고 주소를 고쳐 넣는 과정이 있다.

이걸 알고 나니까 패치가 왜 되는지도 같이 이해가 됐다. 파일 안의 어느 바이트가 메모리의 어디로 가는지가 정해져 있으니까 그 바이트를 고치면 동작이 바뀐다.

컴퓨터를 산 그 가게에 계속 놀러 다녔다. 어느 날 가보니 사장이 Turbo C를 공부하고 있었다.

나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유료였다. 거기서 막혔다.

그 무렵 친구가 QBasic을 알려줬다. 그리고 QuickBASIC이라는 게 따로 있다고 했다. 컴파일이 된다는 거였다.

이게 좀 놀라웠다. 내가 만든 걸 exe로 뽑을 수 있다니. com과 exe가 뭔지 막 알아본 참이었으니 더 그랬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둘의 차이가 명확하다. QBasic은 MS-DOS 5에 딸려온 무료판이라 인터프리터만 있고 실행 파일을 못 만든다. 컴파일러가 들어 있는 건 QuickBASIC 4.5이고 그건 유료 상용판이다. QuickBASIC은 라이브러리를 만들어 쓸 수 있고 CALL INTERRUPT로 도스 기능을 직접 부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벽은 두 번 다 돈이었다. Turbo C에서는 못 넘었고 베이직 쪽에서는 넘었다. 재능이나 정보가 아니라 어느 쪽 프로그램을 손에 넣을 수 있느냐로 갈렸다. 그때는 그게 갈림길인 줄도 몰랐다.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 가입했다. QBasic 동호회였는지 QuickBASIC 동호회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신천지에서도 계속 활동했다.

고등학교 성적은 전교 꼴찌였다.

컴퓨터 직업반

선생님이 권했고 나도 가고 싶었다. 그래서 컴퓨터 직업반에 갔다. 학교에서 외부 기관에 위탁을 보내는 형태였고 여러 학교에서 애들이 모였다.

애들이 다들 게임하는 줄 알고 왔다고 했다.

거기서 C를 배웠다. COBOL과 FORTRAN도 기초를 뗐다. 정보처리기능사를 땄고 정보기기운용기능사도 그 무렵이다.

여기서 확실해졌다. 내가 개발에 재능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학교에서는 전교 꼴찌였는데 여기서는 아니었다. 학교가 재던 축과 내 축이 달랐던 거지, 학교가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고3 때 짝꿍이던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자기 회사에 오라고 했다. 연봉 1억을 주겠다고 했다.

전교 꼴찌한테 한 말이다.

그 친구는 10년쯤 전에 죽었다.

VAX와 Netscape

위탁 기관이 중앙정보처리학원이었다. 거기에 VAX 시스템이 있었고 학원이라 인터넷 전용선이 들어와 있었다.

고3 때 거기서 인터넷을 처음 봤다. Netscape도 그때 처음 띄웠다. 알려준 건 또 친구였다.

세어보면 이게 세 번째다. 하이텔도 친구가 알려줬고 GW-BASIC도 친구가 알려줬고 인터넷도 친구가 알려줬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검색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새로운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한테 들어야 알았다. 있는지 모르는 걸 찾을 방법이 없다. 통신에 자료실이 있어도 뭘 찾을지를 알아야 들어가는 거다.

대학은 못 갔다

공부를 안 했으니 붙을 리가 없었다. 중앙정보처리학원 병설 전산원에 들어갔고 거기서 정보처리기사를 땄다.

거기서 사람을 만났다. MS 자격증을 준비하던 서울대 물리학 박사였다. 그 사람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

회사라고 했지만 원룸이었다. 마음 맞는 사람 서넛이 모여 있었다. 알바비 정도를 받으면서 여덟 달쯤 있었다. 공부도 하고 일도 했다.

이력서를 넣어서 들어간 자리가 아니다. 사람을 통해서 들어갔다.

벤처 두 개가 무너지는 동안

1999년 말에 넷게인홀딩스에 들어갔다. 원룸에 있던 형이 소개해줬다.

제주 관광 사이트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관광 사이트를 만든다는 게 그때 감이 안 왔던 모양이다. 접고 웹진 커뮤니티와 쇼핑몰 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망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들 했다.

망하기 전에 나와서 2000년쯤 이바다닷컴으로 옮겼다. 게임을 만들었고 1년쯤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정반대로 간 회사가 있다.

내가 이야기 다음으로 쓰던 통신 프로그램이 새롬 데이타맨이었다. 그 회사 얘기다.

새롬기술은 1993년에 KAIST 전산과 석사들이 세웠다. 데이타맨은 1998년에 무료로 쓸 수 있는 IMF 버전을 내면서 점유율 1위가 됐다. 공짜로 풀어서 판을 가져간 거다. 1999년 8월에 코스닥에 상장했고, 1999년 10월에 1,890원이던 주가가 2000년 3월 초에 282,000원이 됐다. 149배다.

다이얼패드라는 무료 인터넷 전화 때문이었다. 나는 그 회사가 다이얼패드를 인수해서 대박이 난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인수가 아니라 1999년 10월에 미국에서 직접 시작한 서비스였다. 2000년 초에는 다음과 네이버컴을 인수합병하려다 무산됐다.

그리고 그 회사도 꺼졌다. 다이얼패드는 결국 팔렸다.

그러면 넷게인홀딩스가 너무 앞서가서 망했다는 설명은 잘 안 맞는다. 같은 시기에 같은 쪽으로 간 회사가 149배를 찍었으니까. 방향이 문제였으면 그쪽도 안 됐어야 한다.

그리고 149배를 찍은 쪽도 오래 못 갔다. 1999년 말에 두 회사 안에 있던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몇 년 뒤에 없어졌다.

6개월치

군대 문제가 걸렸다. 회사에서 해결이 안 돼서 병역특례를 외주 뛰는 형태로 하게 됐다. 그러다 이바다닷컴도 못 버티고 망했다.

병특 회사를 다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KT 차세대 프로젝트에 외주로 들어갔는데 쌍용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였고, 쌍용 쪽에서 병특 회사를 구해줬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훈련을 다녀왔다. 오니까 그 병특 회사가 망했다고 했다.

6개월치 월급을 하나도 못 받았다.

쌍용에서는 보냈다고 했다. 확인해보니 돈이 회사 계좌에 들어오면 은행이 다시 빼갔다. 회사가 은행에 빚이 있었던 거다. 들어온 돈이 내 월급이라는 건 은행 입장에서 상관없는 일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싶은 상황이었다.

그다음에 KTF 프로젝트로 들어갔다. 거기서 한국후지쯔 도움으로 병특 회사를 구했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다.

프리랜서에서 나오기

KTF 프로젝트를 몇 년간 프리로 했다. 일은 계속 있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루션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소개팅을 꽤 했는데, 프리랜서라고 소개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이유였다. 일이 없어서 옮기려던 게 아니었다.

솔루션 회사에 들어가서 1년쯤 다녔다. 그런데 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다시 SI를 돌리기 시작했다. 솔루션을 만들러 갔는데 다시 남의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나왔다.

아는 형을 따라 멜론에 프리로 들어갔다. 여기서 결혼했다. 그다음에 리얼네트웍스에 정식으로 입사했고, 카카오엠으로 이적했고, 카카오를 거쳐서 카카오엔터테인먼트까지 왔다.

언어 열두 개

지나온 걸 적어보면 C, C++, COBOL, Assembly, C#, PHP, ASP, React, Vue, Oracle, MySQL, Perl이다.

많이 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열두 개를 갈아탔다는 건 그때그때 필요한 걸 옆 사람한테 물어서 배웠다는 뜻이다. COBOL을 배울 때 COBOL이 좋아서 배운 게 아니다. 그 자리에 그게 있었고 알려줄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다르게도 읽힌다.

열두 번 갈아탔다는 건 어느 하나에도 붙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손에 쥔 도구가 열두 번 바뀌는 동안 안 바뀐 게 있었다면 그건 도구가 아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

돌이켜보면 사람을 많이 만났고 그 덕에 안 해봤을 일들을 했다.

그런데 나한테 길을 알려준 사람들이 지금 다른 일을 한다. 같이 공부했고 같은 자리에서 시작했는데 다른 길을 골랐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직업반 친구들이 그렇다. 지금도 카톡으로 얘기하고 가끔 만난다. 그런데 하는 일은 다 다르다. 같은 교실에서 C를 배우고 COBOL을 배운 사람들 중에 개발자로 남은 건 나뿐이다.

나 때문에 개발자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고 영업으로 넘어간 사람도 있다.

동갑 친구였다. 스물다섯에 만났고 서른다섯에 다시 만났다. 만났을 때는 둘 다 개발자였고, 다시 만났을 때 그 친구는 영업을 하고 있었다. 나한테서 격차가 느껴졌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그 사람도 잘했다.

스물다섯이면 내가 KTF 프로젝트를 프리로 뛰던 때다. 소개팅에서 프리랜서라고 말하기 싫던 그 무렵이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양쪽 다 자기가 불안했다. 그러다 10년 뒤에 한쪽만 격차를 봤다.

격차라는 건 그런 거다. 두 사람 사이에 재놓은 값이 아니라 한쪽에서 본 값이다. 나는 그 사람이 잘한다고 봤고 그 사람은 나를 보고 격차를 봤다. 같은 두 사람을 놓고 관측이 반대로 나왔다.

그 친구 장례식장에서도 다들 만났다.

그러니까 관계가 끊긴 건 아니다. 떠난 건 직업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다들 그대로 있고 하는 일만 갈렸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격차를 느끼게 하는 존재인 것 같다.

앞에서 격차가 재놓은 값이 아니라고 했으니,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것도 같은 종류일 거다. 옆에서 보고 있는 값이 실제로는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 친구는 떠났다.

다섯 날

얼마 전에 회사에서 일이 하나 있었다.

월요일에 지시를 받았다. 코딩과 문서까지 나와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에 프로젝트를 만들고 설계를 했다. 화요일에는 하루 종일 코딩을 시켰다. 수요일과 목요일에 문서 작업을 돌렸고 금요일에 시연했다.

나온 게 데모 수준이 아니었다. 거의 완성된 프로젝트였다.

시킨 쪽이 놀라면서 물었다. 설계만 잘하면 구현부터 문서까지 이렇게 가능한 거냐고.

다섯 날을 다시 놓고 보면 갈리는 자리가 선명하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AI가 했다. 사람이 한 건 월요일 저녁 하나다.

정보화의 시대

술을 마시고 옛날 생각을 하다가 첫째 생각이 났다.

왜 그리로 갔는지는 알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말을 듣고 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중학교 때는 확실히 들었다. 앞으로는 정보화의 시대다. 그 말을 학교에서도 듣고 뉴스에서도 듣고 어른들한테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맞았다. 정말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 말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니다.

같은 교실에서 그 말을 같이 들은 애들이 있다. 직업반에서 C를 같이 배운 친구들이다. 지금도 만나는데 하는 일은 다 다르다. 그 애들이 그 말을 안 들어서 다른 길로 간 게 아니다. 다 같이 들었다.

나를 데려온 건 그 말이 아니라 옆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컴퓨터를 켜는 법을 알려준 가게 사장, 하이텔을 알려준 친구, GW-BASIC을 알려준 친구, 인터넷을 보여준 친구, 회사에 데려간 박사와 형들. 그리고 재미였다. 만드는 게 재미있었고 새로 배우는 게 재미있었고 머릿속에 있는 걸 실제로 굴러가게 만드는 게 재미있었다.

앞으로는 정보화의 시대라는 말은 그중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나

다섯 날을 다시 보면 답이 거기 있다.

AI가 가져간 건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다. 코딩하고 문서 쓰는 일이다. 남은 건 월요일 저녁 하나다.

내가 재미있다고 한 세 가지 중에 만드는 재미는 상당 부분 넘어갔다. 그런데 새로 배우는 것과 머릿속에 있는 걸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안 넘어갔다. 오히려 늘었다. 월요일 저녁이 그거다.

요즘 답이 쉽게 오면 실력이 안 붙는다는 얘기가 많다. 얼마 전에도 개발자들이 그걸로 크게 붙었다. 나는 반대쪽에 있다. AI를 만나고 나서 뭔가 확 피어났다.

왜 갈리는지는 앞에 적어놨다. 언어 열두 개다.

COBOL에서 React까지 열두 번을 갈아탔다는 건 손에 쥔 도구에 붙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구가 열두 번 바뀌는 동안 안 바뀐 게 있었다면 그건 도구가 아니다. 그런 사람한테 AI는 열세 번째다.

만드는 행위 자체가 재미있었던 사람은 뺏겼다고 느낄 거다. 그것도 맞는 얘기다. 어디에 재미를 두고 있었느냐로 갈리는 거지 누가 옳은 게 아니다.

설계가 뭔지도 이제 알겠다. 어느 기종의 책을 볼지 정하는 일이다. 애플 컴퓨터용 책을 붙들고 있던 중3한테 없던 게 그거였다.

중2

첫째가 지금 중2다.

1992년의 나와 같은 나이다. 그 방에 286AT가 들어오던 해다.

이제 앞으로는 AI 시대라고들 한다. 34년 전에 정보화의 시대라고 하던 것과 같은 자리에 그 말이 있다. 맞는 말일 거다. 그때도 맞았으니까.

그래서 요즘 애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 34년을 놓고 보면 마음가짐이 나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정보화의 시대라는 말을 진지하게 새겼기 때문에 개발자가 된 게 아니다. 나는 게임을 복사하러 다녔고 성적은 떨어졌고 전교 꼴찌를 했다. 옆에 사람이 있었고 재미가 있었다. 그게 다다.

달라진 게 하나 있긴 하다.

내 때는 누가 더 빨리 정보를 얻느냐로 갈렸다. 신천지를 아는 애와 모르는 애가 갈렸고, GW-BASIC이 있다는 걸 아는 애와 모르는 애가 갈렸다. 그래서 옆에 누가 있느냐가 그렇게 컸다.

지금은 누구나 빨리 얻는다. 34년을 전북대로 알고 있던 것도 검색 한 번에 끝났다. 그러면 남는 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아닐까 싶다.

월요일 저녁이 그 자리이긴 하다.

어머니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컴퓨터를 사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지금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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